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르투갈 왕국 (문단 편집) ==== [[마리아 2세]] ==== 6년간 이어진 내전 끝에 복위에 성공한 '''[[마리아 2세]]'''는 아버지 [[페드루 1세(브라질)|페드루 1세]]의 섭정을 받았다. 1834년 9월 18일, 포르투갈 의회는 성년이 된 마리아의 친정을 선포했고 그 날 첫번째 장관 회의가 그녀의 주재 하에 거행되었다. 그리고 9월 24일 페드루 1세가 [[결핵]]으로 사망하면서, 그녀는 명실상부한 포르투갈 군주가 되었다. 이후 아버지가 생전에 정한 대로 [[외젠 드 보아르네]]의 장남이자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이며 페드루 1세의 2번째 아내 [[로이히텐베르크의 아멜리|아멜리]]의 오빠인 [[오귀스트 드 보아르네]]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1835년 1월 28일 리스본에서 거행되었지만, 불과 2달 후인 3월 28일에 오귀스트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오귀스트의 장례식이 거행된지 2주 후, 의회는 여왕에게 조속히 재혼해서 후계자를 낳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이에 대해 잇따라 사망한 아버지와 남편을 애도하면서 "같은 제안을 같은 날 2번 듣는 것은 너무 괴로운 마음입니다!"라고 한탄했다. 하지만 측근들은 그녀가 상속인 없이 사망해버리면 내전으로 인해 폐허가 된 포르투갈의 운명을 가늠할 수 없다며 결단을 내려달라고 촉구했다. 결국 그녀는 재혼을 서두르기로 했다. 마리아는 자신을 잘 대해줬던 프랑스 왕실과 혼사를 논의했지만, 프랑스와 포르투갈 간의 결혼 동맹이 맺어지는 것을 우려한 영국의 반대로 실패했다. 여기에 마리아의 계모인 아멜리가 페드루 1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마리아 아멜리아가 포르투갈의 왕위 계승녀가 되어야 한다며 마리아의 재혼을 반대했다. 하지만 마리아는 결혼 협상을 꿋꿋이 이어간 끝에 1836년 4월 9일 [[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의 19세된 왕자 [[페르난두 2세|페르난두]]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곧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1837년 9월 16일 첫 아들 [[페드루 5세|페드루]]가 태어나면서 왕위 계승 논란이 종식되었다. 마리아는 1836년에서 1853년까지 11번의 임신을 했으며, 그 중 7명은 유아기를 무사히 넘겼다. 그녀는 그들의 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들에게 적절한 행동을 요구했다. 한 번은 그녀가 어린 페드루와 함께 공원을 산책하고 있을 때, 어느 평민 아이가 왕자에게 다가와 껴안았다. 깜짝 놀란 왕자가 소년을 밀쳐내고 꾸짖자, 마리아는 왕자의 팔을 잡고 그 아이를 강제로 포옹하게 한 뒤, 아이에게 용서를 구했다. 마리아의 정적들조차도 그녀의 다정한 성품만큼은 인정했다. 야당 신문 <에스페트루(Espectro)>는 1847년경에 그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여왕만큼 고결한 아내와 어머니는 없다. 그녀의 가정은 유럽의 모든 이에게 모범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마리아는 정치 방면에서 곤경에 처했다. 당시 포르투갈 헌법은 자유주의를 국가의 절대적인 이념으로 표방하면서도 의회에 대한 절대적인 거부권을 국왕에게 부여했다. 또한 의회는 영국의 제도를 본받아 상원과 하원으로 나뉘었는데, 국왕이 귀족들로 상원 의원을 임명하고 하원은 제한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된 의원들이 차지했다. 그러나 이 헌법은 좌우 모두의 반대에 직면했다. 많은 포르투갈인들은 미겔 1세가 몰락한 후에도 [[절대왕정]]을 여전히 추종했으며, 자유주의자들로 둘러싸인 여왕을 탐탁치 않게 바라봤다. 한편 언론을 장악한 좌파 계열은 더 많은 자유를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의회에 재직하는 모든 의원이 국민의 투표로 선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대중 주권을 인정하는 1822년의 헌법으로 돌아가야 하고 절대적인 거부권이 아닌 제한된 거부권만 군주에게 주어져야 한다고 외쳤다. 1836년 9월, 리스본의 반체제 자유주의자들이 리스본에서 9월 혁명을 단행했다. 리스본 수비대 상당수가 혁명에 가담하자, 페르난두는 아내에게 항구에 정박해 있는 [[영국 해군]] 함정으로 피신하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랬다가는 저들이 군주제 폐지까지 거론할 수도 있다"며 거부하고, 시위대 대표와 접견한 뒤 1822년 헌법을 받아들이겠다고 서약했다. 이후 혁명 지도자 사 다 반데이라가 내각을 구성했지만, 마리아는 9월 혁명을 되돌리기 위해 벨기에 대사 실뱅 반 데 바이어를 통해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1세]]와 연락했다. 레오폴드 1세는 그녀를 도와주는 대가로 포르투갈이 아프리카 식민지 중 하나를 벨기에에 양도하라고 요구했다. 여왕이 이를 받아들이자, 레오폴드 1세는 영국 정부에 벨기에군을 포르투갈로 수송하는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한편, 마리아는 영국에도 도움을 요청했다. 영국 정부는 타구스 강에 영국 함대를 파견해 그녀를 보호해주겠다고 답했다. 이에 여왕의 측근들은 그녀를 벨렘 궁전으로 피신시킨 뒤 영국의 보호를 받으며 헌법을 되돌리는 방안을 고려했다. 하지만 이 계획의 주동자인 살다냐 공작 주앙 카를루스 그레고리오 도밍구스 비센트 프란시스쿠와 테르세이라 공작 안토니우 주제 세베림 드 노로냐 간의 의견이 엇갈렸다. 살다냐 공작은 1822년 헌법으로 돌아간 것에 불만을 품은 보수파가 장악한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키도록 유도한 뒤, 반데이라 내각이 그쪽에 관심을 돌린 틈을 타 여왕을 빌렘으로 피신시키자고 주장했다. 반면 테르세이라 공작은 여왕을 가능한 한 빨리 빌렘으로 피신시킨 뒤 영국군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는 사이, 왕실이 영국군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다는 정보가 새면서 리스본 언론사에 대서특필되었다. 이를 접한 총리 사 다 반데이라와 내무장관 마누엘 다 실바 파소스는 여왕을 찾아가 사실 여부를 물었다. 마리아가 빌렘 궁전으로 행차하여 영국군의 보호를 받을 예정이라며 사실상 인정하자, 두 사람은 사직서를 제출했다. 마리아는 사직서를 수락하지도 거부하지도 않았고, 마누엘은 그녀가 할아버지 주앙 6세가 그랬던 것처럼 영국 선박에서 피난처를 찾으려 한다면 퇴위 신호로 간주될 거라고 경고했다. 이후 마리아는 남편 페르난두와 함께 벨렘 궁전으로 향해 오후 4시에 도착한 뒤 테르세이라 공이 동원한 충성스러운 국가 방위군의 호위를 받았다. 그 후 여왕은 모든 장관을 해임하고 주제 베르나르디노 드 포르투갈 이 카스트로를 총리로 삼아 새 내각을 구성한다고 선언했고, 기존 헌법을 복원한다는 내용의 법령에 서명했다. 이에 9월 혁명을 따르는 나머지 방위군이 집결해 벨렘으로 진격할 준비에 착수했다. 여기에 친위 쿠데타에 분노한 민중이 대거 모여들어 군대로부터 무기를 수령하고 민병대를 결성해 벨렘을 공격할 태세를 갖췄다. 급기야 여왕의 부름을 받고 내각에 참여하러 가던 아구스티뉴 주제 프레이레는 도중에 9월 혁명을 지지하는 방위군에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아구스티뉴가 총살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벨렘 궁전을 지키던 장병 일부가 겁에 질러 집으로 돌아가버렸고, 일부 포병 부대는 리스본 지지로 돌아섰다. 이에 여왕이 구원을 호소하자, 영국군 함대 지휘관 하워드 드 윌든은 500~700명의 병력을 벨렘과 알칸타라 사이의 지역에 상륙시켰다. 이 소식을 접한 리스본 시민들은 외국군의 개입에 격분해 민병대에 대거 가담하여 벨렘을 압박했고, 벨렘 수비대 역시 대부분 이탈해버렸다.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여왕은 영국군에게 배로 돌아가달라고 요청하고 살다냐 공작에게 전령을 보내 리스본 정부와 협상해 줄 것을 부탁했다. 살다냐 공작은 즉시 리스본 정부와 협의한 끝에 마리아가 이틀 전에 해산한 내각을 재선임하는 대가로 왕권이 존중받을 거라는 합의를 이뤄냈다. 이후 11월 5일 오후 5시, 마리아와 페르난두는 방위군과 군중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리스본에 돌아갔다. 그 후 모든 방위군이 숙소로 돌아갔고, 리스본은 평온을 되찾았다. 1836년 11월 12일에 제헌의회가 소집되었고, 11월 18일 쿠데타 시도에 연루된 이들을 전원 사면한다는 칙령이 발표되었다. 이리하여 혼란이 가라앉는 듯했지만, 이 일로 상호간의 불신이 고조되었다. 이후 수 개월간 헌법 개정이 논의되었지만 결론이 좀처럼 나오지 않자, 민중의 불만은 갈수록 커졌다. 그러던 1838년 3월 초 호세 루시우 트라바소스 발데스가 전쟁장관 직을 사임하자, 급진적인 클럽들과 방위군 병사들은 마리아가 기존 헌법을 부활시키기 위해 새 장관을 세울 것을 우려했다. 1838년 3월 4일, 리스본 총독이자 방위군 사령관인 프란시스쿠 소아르스 칼데이라는 군단 사령관들을 초청해 9월 혁명의 기치에 충실하지 않은 장관을 임명하지 말 것을 여왕에게 요청하는 청원서에 서명하라고 요구했다. 대다수 사령관들은 거부했지만, 히카르두 주제 호드리기스 프랑카가 이끄는 포병 대대는 동의했다. 다음날, 프랑카의 포병 대대는 여왕에게 충성을 다하겠지만 정부를 믿을 수 없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제헌 의회에 보냈다. 1838년 3월 7일, 마리아는 장군들을 사사로운 목적으로 소집한 책임을 물어 칼데이라를 해임하고 안토니우 베르나르두 다 코스타 카브랄을 새 총독에 선임했다. 이 소식을 접한 프랑카 포병 대대는 격분했다. 3월 9일 아침, 그들은 병기고를 점거하고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이에 정부군이 출동해 병기고를 포위하여 무력 충돌이 곧 벌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동족끼리 또다시 피를 보는 것은 원하지 않았던 프랑카는 정부군 지휘관 조르즈 드 아빌레스 수자르테 데 소자 타바레스와 병기고 건너편의 마르쿠스 필리프라는 이름의 커피 하우스에서 접견해 논의한 끝에 반란군은 오후 3시에 병기고를 떠나는 대가로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내용의 '마르쿠스 필리프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프랑카의 포병 대대는 병기고를 떠나 로시우 광장을 행진한 뒤 해산했다. 그러나 그날 저녁 프랑카가 해임되고 포병 대대도 폐지되자, 3월 10일 아침 격분한 장병들이 또다시 병기고 근처에 모여 프랑카의 복직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정부가 이에 대해 별다른 응답을 하지 않자, 그들은 3월 13일 왕궁을 향해 행진하다가 앞을 가로막은 정부군과 맞붙었다. 그 결과 수적으로 열세한 그들이 큰 피해를 입고 상 벤투 궁전 앞에 있는 [[예수회]] 수도원으로 피신했다. 이후 토벌대에게 에워싸인 포병 대대원들은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는 대가로 로시우 광장으로 행진하여 무기를 반납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들이 로시우 광장에 도착했을 때 갑작스러운 발포 소리가 들려왔고, 양자는 서로가 자신들에게 총을 쐈다고 여기고 총기를 난사했다. 그 결과 많은 방위병들이 부상당해 체포되었고, 나머지는 무기를 버리고 집으로 달아났다. 마리아와 포르투갈 정부는 이 사건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또다른 봉기가 일어날 것을 우려해 사건 주모자들을 사면해 사건을 덮기로 했다. 또한 제헌의회는 헌법 개정 작업을 신속하게 진행해 마리아의 19번째 생일인 1838년 4월 4일에 기존 헌법 옹호자들과 급진주의자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헌법을 마련했다. 이에 따르면, 상원은 앞으로 국왕의 선임이 아닌 국민의 투표로 선출된 의원들로 구성되지만, 그 외에 많은 조항이 기존대로 유지되었다. 그녀는 이 헌법을 확고하게 옹호하면서, 앞으로 이를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밝혔다. 1939년, 주제 루시우 트라바소스 발데스가 총리에 선임되었다. 이후 수년간 상대적인 정치적 평화가 이어졌고, 정부에 회유된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반 가톨릭 성향을 포기했다. 또한 1840년 12월 26일 미국과 통상 및 항해에 관한 상호 조약이 체결되면서 포르투갈의 무역 수지가 개선될 기미를 보였다. 1841년 6월 9일, 방위군 개혁을 주도하다가 병사들의 반발을 사자 사임한 발데스의 뒤를 이어 조아킹 안토니우 드 아귀아르가 총리에 취임했다. 1842년 1월 27일, 안토니우 베르나르두 다 코스타 카브랄이 포르투에서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여전히 혼란스러운 포르투갈을 안정시키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쿠데타를 일으켰다. 리스본 정부는 이에 맞서 조아킹 안토니우 드 아귀아르 총리를 페드루 드 소자 이 홀스타인으로 교체했지만, 2월 8일 리스본 수비대가 쿠데타군에 귀순하면서 진압에 실패했다. 카브랄은 리스본에 입성한 뒤 총리에 선임된 후 3월 18일 새로운 행정법을 공포하여 중앙 및 지방 공공 행정을 통제했다. 이에 주제 루시우 트라바소스 발데스가 토레스 노바스에서 반란을 일으켜 카브랄 정권을 타도하려 했지만, 연이은 전투에서 패배한 끝에 1844년 마지막 보루인 왈메이다 시마저 공략되자 항복하고 추방형에 처해졌다. 마리아는 1843년 카브랄을 국가 평의원에 선임하고 1844년에 "왕국의 수호자" 칭호를 내렸으며, 1845년에 토마르 백작에 선임하는 등 굳게 신임했다. 그러나 그가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면서 막대한 부를 거머쥐고 친족들이 여러 요직을 독차지하자, 많은 언론이 이에 대한 비난을 퍼부었다. 여기에 1844년 9월 28일 반포된 매장법은 세간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에 따르면, 교회가 시신을 임의로 매장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정부에 사망을 등록한 뒤 고인의 유골을 공개된 들판에 지어지고 위생 면허를 취득한 묘지에서 매장해야 했다. 이때 유족들은 고인의 사망을 증명할 때까지 장례를 미뤄야 하며, 정부의 승인을 받기 위해 수수료도 지불해야 했다. 당시 포르투갈 국민들은 반복되는 내전과 [[감자 역병]] 및 가뭄으로 인한 경제 위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장례까지 규제당하자 극심한 반감을 품었다. 성직자들 역시 교회 매장을 금지하는 법이 반종교적이며 "악마와 프리메이슨의 인가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선동했다. 그러던 1846년 3월 22일, 폰타칸다 교구의 주민들이 쿠스토디아 테레사라는 이름의 여인을 폰타칸다 교회 묘지에 매장했다. 3월 24일 당국 관료들이 유해를 교회 묘지에서 파내어 공동묘지로 조성할 땅에 이장하려 하자, 주로 여성으로 구성된 군중이 들고 일어나 낫과 파이크, 몽둥이를 휘두르고 돌을 내던지며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에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사건의 주모자로 간주된 4명의 여성을 체포했다. 3월 27일 이들의 공판이 진행되던 중 사람들이 수감자들을 구출하기 위해 감옥으로 행진해 도끼로 감옥문을 부수고 수감자들을 구출했다. 이들의 선두에는 붉은 옷을 눈에 띄게 차려입은 한 젊은 여자가 있었다. 이 여자의 이름은 마리아 안젤리나였지만, 당국의 수사를 피하기 위해 '마리아 드 폰테 아르카다'라는 가명을 썼다. 이 이야기가 퍼지면서 자신을 '마리아 드 폰테'라고 자칭하는 이들의 선동으로 봉기가 잇따랐다. 급기야 봉기가 포르투갈 북부 전역에 확산되자, 마리아는 어쩔수 없이 5월 20일에 카르발을 해임하고 페드루 드 소자 이 홀스타인의 내각을 재수립한 뒤 매장법을 폐지했다. 그러나 페드루 드 소자가 여왕의 정치 관여를 최소한으로 국한시키고 자유주의에 치우친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자, 마리아는 그에게 불만을 품은 끝에 친위 쿠데타를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1846년 10월 6일 살다냐 공작 주앙 카를루스 그레고리오 도밍구스 비센트 프란시스쿠는 여왕의 지시를 받들어 공동 국왕 [[페르난두 2세]]와 그의 고문들과 결탁해 페드루 드 소자를 궁궐로 소환하여 즉각 해임시킨 뒤 자신이 의회 의장을 맡았다. 또한 일전에 실각했던 카르발이 총리에 복직하고 여왕의 의중에 따라 현재의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선포했다. 이 소식이 전국에 알려지자, 포르투를 비롯한 포르투갈 북부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여왕으로부터 반란을 진압하라는 임무를 받은 테르세이라 공작 안토니우 주제 세베림 드 노로냐는 포르투로 갔다가 체포되었고, 자유주의 급진파로 구성된 임시정부가 포르투에 세워졌다. 이후 리스본 정부와 포르투 정부간의 내전이 8개월간 이어지다가 스페인, 영국의 지원을 받은 리스본 정부가 승기를 잡았고, 1847년 6월 29일에 카브랄이 총리 직에서 물러나고, 포르투갈에 남으려는 반란군은 마리아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무기를 반납한다면 사면받을 수 있고, 떠나려는 자들에게 여권을 제공한다는 내용의 그라미도 협약이 체결되면서 종식되었다. 그 후 포르투갈 정부는 살다냐 공작과 카브랄의 세력 다툼으로 점철되었다. 살다냐 공작은 새 총리에 선임된 뒤 의회를 확고히 장악하고 여왕의 수석 집사로 선임되는 등 위세를 떨쳤지만, 1849년 6월 19일 카브랄 파벌의 압력을 받은 여왕에 의해 총리 직에서 해임되었고 카브랄이 재차 총리에 선임되었다. 이에 분노한 살다냐 공작은 야당과 동맹을 맺고 카브랄을 향한 정치적 공세를 퍼부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카브랄의 편을 들었고, 1850년 2월 7일 살다냐 공작을 수석 집사에서 해임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살다냐 공작은 무력으로 해결하기로 마음먹고, 추종자들을 끌어모아 쿠데타를 준비했다. 1851년 4월 7일, 살다냐 공작은 신트라에서 몇몇 참모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마프라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 주둔한 제7 보병연대의 지원을 받으려 했지만, 군인 몇 명만이 그를 따랐고 리스본에 주둔한 부대 중 세투발에서 온 제1 카사도레스 연대에 소속된 소수의 대대만 합세했다. 군대가 제대로 호응해주지 않자, 그는 절망에 빠져 스페인 서북부의 [[갈리시아]]로 망명하려 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카브랄의 정치에 반감을 품고 있던 진보당의 당수 폰테스 페레이라 드 멜루가 리스본에서 대대적인 민중 봉기를 일으켰다. 카브랄은 이에 압도되어 해외로 망명했고, 갈리시아로 갈 준비를 하고 있던 살다냐 공작은 이 소식을 듣자 곧바로 리스본으로 향해 5월 13일 민중의 갈채를 받으며 입성했다. 페르난두 2세는 그에게 육군 총사령관 직임을 맡겼고, 마리아 역시 "이 나라와 왕관의 미래를 아버지의 장군이자 친구에게 전적으로 맡긴다"라고 밝혔다. 그 후 살다냐 공작이 총리에 취임해 1856년 6월까지 국정을 이끌었지만, 실권은 폰테스 페레이라 드 멜루와 진보당에게 주어졌다. 진보당 정권은 17년간 포르투갈을 안정적으로 다스리면서 피폐해진 국가를 재건하고 경제 성장을 일궈냈기에, 포르투갈 역사학계는 이 시기를 "재생(Regeneração)"이라고 지칭한다. 이렇듯 정치적으로 무척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마리아는 별다른 치적을 남기지 못했다. 다만 어린아이들을 위한 보호소와 탁아소를 만들고 초등교육을 개혁하는 등의 정책을 펼쳤기에 "교육자(a Educadora)"와 "좋은 어머니(a Boa Mãe)"라는 별칭을 얻었다. 한편, 그녀는 아이를 낳을 때마다 심한 [[난산]]으로 고생했다. 여왕이 18세일 때 낳은 셋째 아이는 32시간의 진통 끝에 사산되었고, 의사들은 더 이상 자녀를 낳지 않는 것을 권했다. 그러나 많은 자식을 낳는 게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여왕은, 이후로도 치세의 대부분을 [[임신]] 상태로 있었다. 계속된 임신과 [[출산]]으로 건강이 심각하게 상했고, 다섯째 아이부터는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왕은 자신이 죽는다면 그것 또한 하느님의 뜻이라 말했고, 자녀 계획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여왕은 사산과 유산을 반복하다가 1853년 11월 15일 막내아들인 에우제니우를 낳을 때 13시간의 진통 끝에 겨우 출산했으나 곧 사망했고, 태어난 아기 역시 곧 죽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